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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우 생태에세이】 푸름에 홀릭…chapter 02. 들풀에 빠진 여자

■ 백부자

이지우 작가 | 기사입력 2023/04/08 [18:58]

【이지우 생태에세이】 푸름에 홀릭…chapter 02. 들풀에 빠진 여자

■ 백부자

이지우 작가 | 입력 : 2023/04/08 [18:58]

▲ 이지우 작가, 약력: 『현대수필』 수필등단, 『시현실』, 시등단저서: 생태에세이『푸름에 홀릭』 2쇄     ©골든타임즈

 

 

나무는 봄부터 뜨거운 여름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병충해 등을 견디며 길게는 수십 년에서 수천 년의 나이테를 키운다.

 

가을이 되면 단풍의 절정에서 고생한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기라도 하듯이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떨어뜨린다. 철저히 겨울 준비가 끝났기에 미세한 바람도 마다하지 않고 나무와 이별도, 덜어내기 작업도 과감하게 한다. 마지막까지 자연에 돌려주기 위한 작업이기에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한다. 이런 모습을 보다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자연 앞에 고개가 숙어진다. -저자 머리말 중에서-

 

 

 

백부자

 

 

아침부터 폭염주의보 문자를 받았다. 얼마나 더울지 걱정되나 남한산성을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오늘은 또 어떤 꽃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기대로 얼음물 하나 배낭에 넣고 들풀 탐방길에 나섰다.

 

북문 방향 어느 집 담장 아래 자그마한 화단 안에 핀 청보라 꽃이 눈길을 끈다. ‘뭘까?’ 나와 일행은 처음 보는 꽃이라 사진을 찍어 ‘모야모’라는 앱에 올렸다. 2초도 안 돼 답이 쭉 올라온다. ‘중국물망초’란다. 꽃 이름은 쉽게 알았지만 어렵게 얻은 답이 아니라서 그런지 힘이 쭉 빠진다.

 

추우나 더우나 몇 년을 들풀 공부한답시고 이 산 저 산을 들풀 매력에 쏙 빠져 다녔건만 이런 편리한 앱이 생기다니 좋다고 해야 하나…. 무거운 도감과 도시락 간식과 물, 우산, 우비에… 바리바리 싸 들고 추우나 더우나 다녔던 지난날이 있었는데 편리한 앱이 생겨 등짐을 가볍게 해줘 고맙기도 한 불편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직접 확인이 중요하기에 몇 사람이 조사팀을 만들어 남한산성 안에 있는 들풀을 찾기로 했다. 거의 다 아는 풀이지만,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러주다 보면 한자리에서 30분 이상 소비된다. 쪼그리고 앉아 더위도 잊은 채 풀밭을 뒤진다. 꽃과 가장 가까운 자세로 엎드려 관찰한다. 잎은 마주났는지, 털의 모양은 어떤지, 꽃잎과 총포는…,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들풀 매력에 점점 쏙 빠져든다. 관찰하느라 꿇었던 무릎에는 흙이 따라나서고 한참을 앉아있다 일어날 때는 현기증도 난다.

 

“식물원에 가면 모두 있는 풀들인데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며 다녀야 하나요?” 젊은 선생이 벌써 불만을 이야기한다. “식물원 가면 다양한 식물을 만나 좋기는 하지만 숲에서 귀한 들풀을 찾았을 때 그 묘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지요.” 그러던 참에 지나가던 분이 묻는다.

 

“백부자를 보셨나요?”

 

“아직요, 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찾아가는 중이에요.”

 

“아, 그렇군요. 꼭 만나고 가세요.”라는 말을 건네주고 앞서간다. 카메라를 메고 온 걸로 보아 희귀식물을 찾아 사진 속에 담으러 온 사람이다.

 

 

 

 

 

 

 

 

 

 

 

 

 

 

 

 

 

 

 

▲ 백부자

 

 

 

 

 

 

 

 

 

 

 

 

 

 

 

 

나는 마음속으로 들풀과 나무, 어린나무까지 보이는 대로 이름을 불러 주며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를 앞서간 분과 다시 마주쳤다.

 

“여기 백부자가 있어요.”

 

“이게 백부자구나.”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꽃잎은 해골처럼 동글한 모양에 흰색과 연분홍색을 띠고 있다. 잎은 마치 코스모스처럼 가늘고 깊게 갈라진 결각이 인상적이다. 숲에서 처음 만난 꽃이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흥분된 상태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마도 심마니의 심정이 이러하리라. 그런데 이 친구는 ‘어쩌다 성벽 끝에 피었을까.’ 절벽 위에 홀연히 피어 있는 백부자…. 사람의 눈을 피해 절벽까지 밀려와 외로운 투쟁을 하며 후손을 남기는 일에 열심이다. ‘노옹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따주던 장소는 이보다 더 경사진 곳이었을까?’라는 생각과 이 식물은 ‘약재로도 쓰인다는데….’ 누군가의 손이 탈까 걱정은 되었지만,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카메라에 백부자의 모습만 열심히 담았다. 이제 한동안 산에 안 와도 될 만큼 백부자를 만나 마음의 부자가 되어 산을 내려왔다.

 

며칠이 지났다. 남한산성을 혼자 지키는 백부자가 궁금했다. 일행들과 함께 현장을 가보니 아뿔싸, 백부자 자리엔 커다란 깨진 기왓장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이를 어쩌나’ 끌탕을 하며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사라진 백부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귀한 약재로 쓰이는 꽃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만인에게 보았을 때 행복감과 희열감을 안겨줬던 희귀식물을 개인 이기심으로 캐가다니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가슴이 아팠다.

 

사람의 이기심을 어떻게 바꾸지? 미약한 혼자의 힘이 안타까워 한참을 씩씩거렸다. 마음을 접은 채 성곽 옆에 꽃봉오리를 달고 있던 ‘자주쓴풀’을 찾으러 나섰다. 마침, 가을 들풀들 사이에서 빼꼼히 고개 든 자주보랏빛의 꽃이 보인다. 

 

 

 

 

 

 

 

 

 

 

 

 

 

 

 

▲ 자주쓴 풀

 

잠시 전 아쉬움과 실망감은 까마득히 잊은 채 흥분된 마음으로 나는 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래, 난 분명히 들풀에 빠진 거 맞아. 영화 한 편, 소설 한 편을 본 것보다 더 많은 감동을 받으니.’ 속으로 주절주절 ‘자주쓴풀’과 노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른 풀이 또 뭐가 있을까 왔다 갔다 한다. 어느새 산등성에 걸린 붉은 해가 혀를 불쑥 내밀면서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이크, 또 어두워질 때까지 숲에 있었네. 그래, 난, 들풀에 빠진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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